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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이윤석 부친과 함께 가평3.1항일 운동 선구적으로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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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이윤석 부친과 함께 가평3.1항일 운동 선구적으로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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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석((李胤錫, 1894~ 1953·사진)은 가평군 북면 목동리 출신으로 호는 자운(紫雲)이다. 어릴적부터 조부 이교영(李敎英)과 부친에게서 한학을 수학하고 가평의 가릉보성학교(嘉陵普成學校)를 졸업했다. 

또 양주의 양잠강습소를 수료하고 이곳의 교사로 있다가 1913년 양평육영의숙의 교사가 됐다. 이윤석의 삶에 그의 부친의 영향이 상당했기에 그에 대해 언급하기전 그의 부친 이규봉을 짚고 넘어가려 한다. 

이윤석의 아버지 이규봉(李圭鳳)은 (1873.2.18~ 1961)은 1890년 서당을 차려 후학을 양성하다가 1895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발하자 의병장 이충응(李忠應)과 더불어 봉기하여 의병항쟁을 전개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사상 함양교육을 위하여 가평에 가능보성학교(嘉陵普成學敎)를 설립하여 이윤석, 정한교, 신숙, 민영순, 나기호(연세대 학장, 경신고등학교 이사장 역임) 등 많은 애국청년을 배출했다.


항일 투쟁 전개, 서대문형무소서 2년간 옥고


가평독립운동사와 가평3.1항일운동사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윤석 가족의 내용이 나온다. 1919년 고종황제 인산(因山, 장례식)일에 상경하여 3.1 만세운동에 참가했다. 3월 2일, 3.1운동의 천도교측의 간사인 가평 출신의 세제자 정한교 신숙 민영순을 만나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을 전달 받은 뒤 가평에 내려와 거사준비를 했다. 

거사일을 3월 15일로 정하고, 비밀유지를 위해 가족과 제자들을 주축으로 지휘부를 조직했다. 총지휘를 이규봉이 맡았고 선봉대장에 아들 이윤석(李胤錫)을 앞세웠고 참모진으로 사위 최인화(崔仁和, 8개월 옥고), 조카 이만석(李萬錫, 1년 6월 옥고), 제자 정흥교(鄭興敎)으로 임명하고 본부 연락원은 동생 이규붕(李圭鵬)으로 정했다. 3.1만세운동이 지역적으로 절정을 이룬 시기는 3월 30~4월 3일인 반면, 가평만세운동은 3월 15-16일로 경기도의 첫 대규모 만세운동이 이규봉-윤석 부자 집안의 주도로 선구적으로 전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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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한의사국시에 합격 후 한의원 운영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3월 14일 이윤석은 정흥교와 만나 독립선언서를 보여주고, 3월 15일 오전 9시에 독립만세시위를 가평읍에서 전개하니 참여하라는 격문을 정흥교가 1통, 이윤석이 2통 등 3통을 작성하여 정흥교가 적목리·단녕리·과대리·백비리의 연락을 담당키로 하고, 이윤석은 이곡리·화악리·소법리 일대를 담당키로 하였다. 

이에 1통을 이만석(李萬錫)에게 주고 나머지 1통을 정재명(鄭在明)에게 주었다. 그 후 수백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자신이 제작한 10여 개의 태극기를 앞세우고 군청으로 행진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고, 학교와 면사무소로 시위 행진했다. 이에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정흥교 등 10여 명의 동지와 함께 체포돼 헌병대 분견소로 끌려갔다. 

다음날 장기영(張基榮) 장호리(張浩利) 등이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지만 결국 구속돼 이해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보안법위반과 소요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이윤석은 기독교인으로 세례를 받고 1926년 감리교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 감리교 신학대 전신)를 졸업한 뒤,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황성신문을 창간한 남궁억(南宮檍) 장로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그러나 1933년 조선역사사건, 무궁화사건, 십자가당사건의 핵심인물로 일경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다시 한번 치렀다. 

이후부터 이윤석은 장단교회와 가평교회에서 목사로 재직하며 어릴 적 익힌 의생 공부를 다시 시작한 거로 보인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건국준비위원회 강원도위원회 총무를 지내며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국가를 위해 일했고 1948년 결국 한의사 국가고시에 합격, 한의원을 개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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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소실로 가족들 독립운동가로 불인정


이윤석은 1977년 12월 13일 독립유공자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고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1묘역에 안장됐다. 그러나 안타까운 점은 6.25 때 법정 판결문 등 자료가 소실돼 이윤석을 제외한 다른 가족은 모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지 못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독립운동가의 기준은 독립운동에 참여한 배경, 집안, 그리고 실제 독립운동 관련 기록이다. 

그 외 반민족행위의 기록이 발견된 사람은 서훈이 취소되어야 맞기는 하지만 현재 독립유공자 서훈법에서 독립운동 혹은 광복 이후 행적이 불분명하면 서훈을 주지 않는다. 

즉 독립운동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국가유공자의 경우 국가유공과 관련된 업적 하나만 평가하여 서훈을 주는데 그에 비해 독립운동가의 기준은 인생 전체를 평가하는 느낌이어서 참으로 야박하다 느껴진다. 

그렇다고 독립유공자와 국가유공자의 혜택이 별반 차이도 나지 않는다. 필자만 해도 이러한데 실제 독립유공자 가족들의 마음은 오죽할까.

 

* 정상규 작가는 지난 6년간 역사에 가려지고 숨겨진 위인들을 발굴하여 다양한 역사 콘텐츠로 알려왔다. 최근까지 514명의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들의 보건 및 복지문제를 도왔으며, 오랜 시간 미 서훈(나라를 위하여 세운 공로의 등급에 따라 훈장을 받지 못한)된 유공자를 돕는 일을 맡아왔다.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정상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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